
여름, 그 뚜렷한 계절의 햇살이 창문으로 비껴 들어왔다. 후덥지근한 열기에 숨이 막혀올 때 즈음, 나츠메 타카시는 부스스 눈을 떴다. 어느덧 익숙해진 천장을 한동안 바라보다 몸을 일으키자 그의 가슴 위에서 몸을 말고 자던 냥코센세가 얇은 이불 위로 굴러 떨어졌다.
‘답답했던 건 센세 때문이었나.’
나츠메는 잠에서 깰 생각이 없는 듯 여전히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고 있는 센세를 바라보다 조심스레 그를 쓰다듬었다. 손가락의 끝에서부터 전해지는 온기에 불안하게 일렁이던 마음이 천천히 진정되기 시작했다. 눈을 뜨면 사라질 악몽을 꾸는 것은 이제 그만해도 될 터인데, 아직도 이리 휘둘리는 이유는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한 불안감 때문이랴. 그는 여전히 자신이 이곳에 있어도 괜찮은지 고민하고 또 의심하며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죄책감을 쌓아가고 있었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까. 아마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었다.
“어이, 나츠메. 학교 갈 준비 안 하냐?”
“왓-! 센세, 언제 일어났어?”
“방금 전에. 빨리 씻고 밥 먹으러 내려와라. 오늘은 아침부터 진수성찬일 테니까!”
나츠메는 아직 온전히 잠에서 벗어나지 못해 비몽사몽한 얼굴을 하고서도 서둘러 방을 나가는 센세의 모습을 보며 작은 웃음을 흘렸다. 밑바닥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려던 위태로움을 겨우 삼켜내고, 그는 평소와 같은 아침을 맞이했다. 피부 위로 내려앉는 여름의 빛이 따사롭기만 했다.
“타카시, 도시락 챙겨야지.”
“아, 네! 감사합니다.”
나츠메는 시계를 확인하고 황급히 집을 나서려 하였다. 늦장을 부린 탓인지 지각을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급한 상황에서도 그는 자신을 챙겨주는 토코의 시선에서 묘한 감정을 읽어내었다. 어렸을 때부터 타인을 눈치를 보며 자란 그에게 누군가의 모호한 마음을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이 순수한 호의였던 적은 거의 없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후지와라 부부의 다정함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저기, 토코 상. 혹시 하실 말씀이라도…….”
“선물은 나중에 줘야겠지? 지각하면 안 되니까.”
나츠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시게루도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는지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토코는 손을 뻗어 나츠메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그 상냥한 손길에 오늘이 무슨 날인지 생각을 멈추는 것도 잠시였다.
“생일 축하한다, 타카시. 우리한테 와줘서 고마워.”
그리 길지 않은 문장이 머릿속에 들어와 마음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던 그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기분에 고개를 숙였다. 와줘서 고맙다니, 그런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그는 입을 틀어막으며 잠시 숨을 멈추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새어나오려는 것을 막던 그는, 자신을 부르는 후지와라 부부의 따듯한 목소리에 겨우 한 마디를 내뱉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는 붉어진 눈가를 비비며 집을 나섰다. 어딘가에서 옅은 바람이 불어왔다. 그것은 이제껏 마주하지 못했던 계절을 가득 담고, 짙푸른 녹음의 그림자를 흔들었다.
-
“나츠메, 냉장고에 있는 케이크가 어떤 케이크일 것 같냐?”
“나야 모르지. …생크림이려나?”
나츠메는 냥코센세가 하는 얘기들을 흘리고서는 느릿하게 걸어갔다. 학교를 마친 그의 손에는 아침과는 다르게 꽤나 많은 것들이 들려있었다. 자신의 생일을 기억해준 친구들이 준비한 선물들 때문이었다. 평소보다 시끌벅적했던 시간이 썩 나쁘지 않았다. 그는 축하 인사를 건네고서는 밤에 불꽃놀이를 하러 가자며 들떠있던 친구들의 모습을 곱씹으며 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딛고 서있는 세상이 전보다는 단단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고 되새기던 그는 결국 하루 종일 억누르고 있던 눈물방울을 떨어트렸다. 앞서 걸어가던 냥코센세는 그의 발걸음이 멈춘 것을 알아차렸지만 어서 오라는 재촉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울음소리를 삼키는 것은 무의식적인 습관이었기에, 나츠메가 진정하기 전까지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적막뿐이었다. 한참이나 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겨우 시선을 들고 자신을 기다려주는 센세에게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 이제 가자.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서 선명한 기쁨이 묻어나왔다.
“…레이코?”
나츠메는 다시금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반짝이는 햇살 아래, 그리움으로 가득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한 요괴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나츠메에게 다가가 마치 쉽게 부서지는 것을 만지기라도 하듯 조심스레 그를 매만졌다. 물기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던 요괴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그와 이마를 맞대었다. 그 서늘함이 온전히 전해졌다. 나츠메는 마음 속으로 작은 한숨을 쉬었다. 자신을 레이코로 착각하는 이들에게 사실을 말하는 것이 잔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덧없는 희망을 붙잡고 있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었기에.
“미안해. 나는 레이코 상이 아니야.”
“뭐? 그럼 누군데?”
“나는 레이코 상의 손자야. 나츠메 타카시라고 해.”
그의 말에 잠시 멍해있던 요괴는 갑작스레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때렸다. 당황한 나츠메가 괜찮은지 묻자 요괴는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괜찮아. 그렇게 답하는 그의 목소리에 아주 조금이지만 물기가 어려있었다. 아마도 레이코 상을 떠올리고 있는 거겠지. 나츠메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 안에는 이제는 지나가버려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아득한 시절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기, 괜찮으면 잠깐 우리 집에 들렀다 갈래? 그리고 우인장에 이름이 있다면 돌려줄게.”
요괴는 꽤나 고민하는 듯 주저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용히 나츠메를 따라갔다. 마치 오랜만에 고향이 온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던 요괴의 표정이 조금씩 풀려갔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나츠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바람에 스치는 이파리들의 소리와 함께 짙어져가는 여름의 향기가 어딘가 마음 깊은 곳을 찌르고 들었다.
“선물들이 많네. 오늘 무슨 날이었어?”
“생일이거든. 그나저나 같이 들어줘서 고마워.”
요괴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서는 자신이 들고 있던 것들을 방 한 구석에 놓아두었다. 그것들을 풀어 선물을 확인하기도 전, 나츠메는 우인장을 집어 들었다. 요괴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자리에 앉아 중얼거렸다. 곧 레이코도 생일일 텐데. 나츠메는 그 한 마디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이코 상의 생일을 알아?”
“어? 아니, 나도 몰라.”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은 마음에, 나츠메는 더 이상 말을 얹지 않고 요괴의 앞에 앉았다. 언제나처럼 팔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넘어가던 종이가 멈추고, 검은빛의 글자들이 주인에게로 돌아간다. 금세라도 뭉그러져 녹아내릴 것 같은 계절을 가득 담고, 흘러드는 것은 어느 무더운 날의 기억이었다.
-
거기 너! 나무 위에서 뭐 해?
빛나던 날에 만난, 아름다운 이. 나츠메 레이코에 대한 것을 묻는다면 그리 대답하고 싶었다. 그냥, 인간 구경. 요괴의 대답에 레이코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반짝이는 동시에 어딘지 모르게 메마른 삭막함을 머금고 있어서,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녀가 마음에 든 이유는 단순히 인간이었기 때문임은 아니리라. 살랑이는 나무 그림자 아래 서서는 손바닥으로 햇살을 가려보는 레이코의 모습이 그 어느 계절보다 찬연했고, 순식간에 지나가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 위태롭기만 했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요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손에 든 건 뭐야?
생일 축하 편지. 누가 떨어트린 걸 주웠는데, 주인을 찾아주긴 힘들겠지?
생일?
레이코는 그제야 생일이라는 개념이 요괴에게는 필요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영원을 사는 그들에게 태어난 날을 정해 기념하는 일은 무의미할 뿐이었다. 그녀가 생일에 대해 설명해주는 것을 흥미롭게 듣던 요괴는 나무 아래로 내려왔다. 꽤나 큰 키를 가진 그를 올려다보며 레이코는 즐거운 듯 웃을 뿐이었다.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인간의 온기를 느껴보는 것은 낯설기만 했다.
네 생일은 언제야?
몰라. 딱히 축하해 본 적이 없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나저나 우리 내기하자, 라는 말을 잇는 레이코를 빤히 바라보던 요괴는 더디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무언가가 가슴을 꽉 막고 있는 듯한 답답함에 살풋 인상을 썼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을 단어로 꺼낼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된 것이랴. 요괴가 인간의 감정에 대해 말하고 이해하는 것은 힘들기만 한 일이었다.
내기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요괴에게서 이름을 받아낸 레이코는 미련 없이 걸음을 옮기려 들었다. 푸른 하늘 아래, 뭉게구름이 느리게 흘러갔다. 요괴는 그런 그녀를 붙잡았다.
기억나지 않는다면 오늘로 하자. 레이코, 생일 축하해.
요괴는 아주 작은 꽃반지를 레이코의 손에 쥐어주었다. 언젠가, 인간들이 가지고 놀던 것을 보고 만들어 본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이런 것을 선물해 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요괴는 배시시 웃어보였다. 그런 그를 빤히 응시하던 레이코는 아주 조심스럽게 요괴가 건넨 것을 감싸 쥐었다. 그녀는 환히 웃어보였다.
뭐야, 그게. 완전 네 멋대로네!
“7월의 어느 날이었는데.”
나츠메 타카시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자신의 뺨을 쓰다듬는 요괴의 표정이, 그가 레이코를 바라볼 때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곳에는 레이코 상의 생일을 다시 한 번 축하해주기 위해 온 거야?”
“그래. 매년.. 녹음이 짙푸른 이 계절에 돌아왔어.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나츠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잠시 엿본 기억 속에서 너무 많은 것들이 휘몰아쳤기에, 받아들이기까지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잠시 적막이 쌓이는 동안 요괴는 방을 한 번 더 둘러보고서는 눈을 접어 다정히 웃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너를 만나서. 네 생일이 시린 겨울이 아니라서, 이리도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받으며 행복해서 다행이야. …생일 축하해, 타카시. 태어나줘서 고마워.”
요괴가 전하는 인사는 온전히 나츠메 타카시를 향한 것이라,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소중하고 절대 잊고 싶지 않은 것들만 쌓여간다. 그는 들었을까? 자리를 떠나기 전, 레이코 상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인사를.
“축하해줘서 고마워.”
결국 눈물을 내보이고 마는 요괴를 위로하며, 나츠메는 노을이 깔리기 시작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름, 그 뚜렷한 계절이 시작되는 그 순간. 나츠메 타카시의 생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