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 번의 하루
소림 (@L17F0)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미적지근한 바람이 불었다.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타누마의 자리는 기가 막히게 바람을 피해 가는 명당이었다. 타누마는 바람이 끊긴 것을 아쉬워하며 교문 담벼락 위에서 총총거리는 작은 새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도 세 마리네…. 오늘도? 국어 교사가 타누마를 호명하기 전까지는.
"타누마. 4번 답은 몇 번이지?"
그는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학생을 기가 막히게 잡아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타누마가 급히 교과서를 내려다봤지만 애석하게도 국어는 그의 특기 과목이 아니었다. 타누마는 문제를 읽을 여유도 없이 가장 눈에 들어오는 선택지를 불렀다.
"그러니까…. 3번? 입니다."
타누마의 확신 없는 대답에 반 아이들이 낮게 웃었다.
"흠. 조용. 맞다."
교사는 타누마가 답을 맞힌 것이 우연이라는 사실을 아는 눈치였지만, 타누마가 겸연쩍게 웃는 모습을 보고 잠자코 해설로 넘어갔다. 타누마는 칠판에 시선을 두려 노력했지만, 오늘 아침부터 지긋지긋하게 이어져 온 기묘한 감각 탓으로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풍경風磬을 바라보며 '오늘은 바람이 잦구나'라고 중얼거리시던 아침에도, 학교 앞에서 마주친 사사다가 '오늘 점심 잊지 않았지?'라고 말하며 지나간 등굣길에도 느낀 감각이다. 사소한 느낌일 뿐이라고 치부하기에 그것은 오전 4교시 내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새로운 지식들, 두루뭉술하게 떠오르는 문제의 답들. 그것들은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불명확했다.
타누마는 앞자리 녀석이 떨어뜨린 지우개가 바닥에 일정한 각도로 튕겨오는 것을 주우며 멍하니 생각했다. 어라, 나 이런 꿈을 꾼 적이 있던가….
◆ ◆ ◆
애달픈 소리를 듣고 발을 멈춘 것은 칠월 첫째 날의 등굣길이었다. 끼이 끼이 하는 외침은 작은 새의 신음 같기도, 새끼고양이가 끙끙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소리의 진원지를 따라 냇가로 내려가자 아침 햇살에 빛나는 물결이 눈부셨다. 전날 쏟아진 비 때문인지 시냇물은 평소보다 빠르게 흘렀다. 물속에 작은 짐승이 빠지기라도 했을까.
'응?'
햇빛을 반사하는 물결이라 생각했던 것들은 시냇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무수한 은빛 줄기였다. 은은한 빛으로 수면을 밝히는 것이 척 봐도 인간의 눈에 보일 만한 동물은 아니었다. 흰 뱀이나 기다란 은갈치를 연상시키는 그것들은 물살에 반하며 자유로이 휘돌았다. 상류 방향으로 향할수록 눈부심이 잦아들었다. 아까 들린 소리도 저 요괴의 울음소리였을까? 그러나 끼이 끼이 하는 소리는 멀어지지 않고 여전히 가까이 들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 살피니 시내 중간 즈음에서 반짝이는 은빛이 보였다. 그것은 동료 줄기를 따라가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는데, 그것을 감싼 탁한 기운 탓인 듯했다.
- 끼이이, 끼이….
가느다란 은빛 줄기는 탁한 기운에 저항하려 한참을 파닥댔으나 점차 움직임이 둔해지고 있었다. 나는 얇은 하복 바지를 무릎 위까지 단단히 걷고, 신발과 양말을 벗어 둔 뒤 냇물에 발을 담갔다. 맑은 시냇물은 생각보다 차가와서 발끝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야옹 선생이 봤다면 분명 또 쓸데없는 오지랖이라고 하겠지만, 그냥 지나치기에 너무 구슬픈 울음소리였다. 은빛 줄기는 정확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인간을 보고 당황한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다가가다 말고 우뚝 멈춰서서 천천히 말했다.
"겁내지 마. 널 해치려는 게 아니야."
안심시키려는 마음이 전해졌을까. 은빛 줄기는 탁한 기운 안에서 둥그렇게 돌며 끼이이 하고 낮게 울었다. 이걸 어쩐다…. 우선 양손으로 탁한 기운이 서린 물 위를 무작정 흩었다. 물러나는 듯하던 기운은 이내 불만스레 팔목에 엉겨 붙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축축하고 차가운 느낌과 함께 시각적인 불쾌감이 엄습했다. 기겁하며 털어내자, 기운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저 건너편으로 흩어졌다.
'너무 쉽게 쫓아지는 거 아냐?'
김이 빠져서 수면을 내려다보자, 은빛 줄기가 아직 가지 않고 그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나는 상류 방향을 손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네 친구들은 저리로 갔어."
은빛 줄기는 (아마도) 몸선의 앞부분을 까딱거렸다. 인간으로 치면 고개를 갸웃거리는 몸짓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더니 돌연 헤엄쳐와 맨 발목을 휘감는 것이 아닌가.
"잠, 이봐!"
간지럽고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빛의 발찌처럼 달라붙은 그것은 점차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당황해서 발을 뒤로 물렸지만 소용없었다. 발꿈치를 첨벙거린 통에 물방울이 튀어 올라 무릎께의 바지를 적셨다. 하필 그때였다.
"어~이, 나츠메, 뭐 해?"
멀리서 니시무라가 두 손을 모아 소리치고 있었다. 옆에 선 키타모토가 시원스레 손을 흔들어 보였다. 등굣길에 뜬금없이 냇물에 들어가 있는 모습이 분명 이상해 보이겠지. 나츠메는 어느 여름날 요괴 때문에 다리 위에서 물에 빠졌다 니시무라와 키타모토가 사색이 되어 달려온 일을 떠올렸다. "그냥 좀…." 하고 얼버무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자, 은빛 줄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상류 방향을 바라보자, 뒤늦게 동료들의 꽁무니를 쫓는 여린 은빛 한 줄기가 보였다. 무사히 따라갔구나. 왜 자신의 발목을 휘감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은 눈에 보이는 이상이 없었기 때문에 안도했다. 이끼 낀 바위에 주저앉아 양말을 신는 사이 니시무라와 키타모토가 다가왔다.
그날은 칠월 첫째 날이자 내 생일이었다. 교내 반입 금지일 터인 케이크를 어떻게 숨겨왔는지 빈 교실에서 작은 파티가 벌어졌다. 기습적으로 코에 생크림을 묻힌 것은 타키였다. 한 번쯤 해보고 싶었다며 혀를 내밀고 웃는 타키의 얼굴에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조금 우스꽝스러운 꼴로 찍은 사진을 한 명씩 나눠 가졌다. 즐거운 시간도 잠깐, 소란스러운 기척에 교실 문을 연 선생님에게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혼나야 했다.
야츠하라의 요괴들은 지붕 위에 저들의 선물을 수북이 쌓아두었다. 영문 모를 것도, 나는 먹거나 쓸 수 없는 것도 있었지만 그 마음만은 하나하나 소중했다. 후지와라 부부는 함께 고른 시계를 선물해 주셨다. 튼튼하다고 소문난 상표의 시계였다. 가장 안쪽으로 조여도 팔목에서 약간 헐렁대는 시곗줄을 보고, 토코 씨는 오늘부터 밥을 한 주걱씩 더 먹으라며 짐짓 엄포를 놓으셨다. 가라아게를 포식한 야옹 선생이 창가 아래 밤공기를 맞으며 도로롱거렸다. 선생은 내가 아직 한 번도 써보지 못한 방석—사사다로부터 선물 받은—을 깔고 누워 있었다. 손목시계를 찬 손목을 들어 보았다. 이렇게 값진 것을 몸에 걸치는 것은 처음이다. 물론 이토록 귀중하게 느껴지는 것은 시계의 가격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래도 역시 잘 땐 빼고 자야겠지. 아쉬운 마음을 갈무리하며 시계를 풀어 책상 위에 고이 올려두었다.
정말 즐거운 하루였어. 마음 같아서는 오늘이 끝나지 않았으면 싶을 정도였다. 그날 밤 행복한 꿈을 꿀 것 같은 예감으로 유독 깊이 잠들었고, 덕분에 발목을 옅은 은빛이 휘감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하루가 다시 시작되었다.
창문 밖은 아직 어두웠다. 새가 짹짹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이른 새벽인 듯했다. 잠이 덜 깨 흐린 눈으로 탁상시계를 훑자 서너 시 경이었다. '아직 더 잘 수 있겠는걸….' 다시 잠을 청하려 했을 때였다.
"어?"
뭔가를 깨닫고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책상 위에 있어야 할 손목시계가 보이지 않았던 까닭이다.
"뭐냐! 침입자라도 든 게냐!?"
언제 방석에서 자리를 옮겼는지 이불 위에 잠들어 있던 야옹 선생이 굴러떨어지며 퍼뜩 경계 태세를 갖췄다. 선생은 곧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내 등을 들이받았다.
"1등급 오징어포와 함께 신선주酒를 헤엄치는 행복한 꿈을 꾸고 있었건만!"
"으윽. 아파, 선생…."
등을 문지르며 책상 아래를 굽어봤지만, 그곳에 시계가 있을 리 만무했다.
"이상하다. 선생, 내 시계 봤어?"
"무슨 시계? 저것 말이냐?"
선생이 몽땅한 팔로 가리킨 것은 원래부터 방에 있던 녹색 탁상시계였다.
"아니. 어제 두 분이 생일 선물로 주신 손목시계 말야."
"토코와 시게루가? 처음 듣는군. 게다가 야츠하라 녀석들이 며칠 전부터 야단스레 준비하던 네 생일은 오늘이잖느냐."
"무슨 소리야, 선생……."
잠이 덜 깼냐고 타박하려다 헛숨을 삼켰다. 방의 모습이 잠들기 전과 달랐다. 방 한구석에 쌓여 있던 요괴들의 선물도, 어제 선생이 깔고 잠들었던 사사다로부터 받은 방석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이건 마치…, 어제 아침 풍경과도 같지 않은가.
"꿈인가…? 선생. 나 한 번만 꼬집어 줘."
"잠이 덜 깼구나, 나츠메. 에잇!"
"으아아!"
야옹 선생이 작정하고 허벅지를 꼬집은 덕분에 낮은 비명을 질렀다. 누가 이렇게 세게 꼬집어 달래!? 그렇게 항변할 힘이 없을 만큼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잠이 덜 깬 건 난가?' 혼란스러운 머리를 베개에 묻으며 중얼거렸다.
"일단…. 다시 잘래."
"싱겁긴. 늦잠 자도 모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상한 것은 나도 선생도 아닌 '7월 1일'이었다. 등교 준비를 마치고 1층으로 내려가서 마주한 식탁은, 갈치 구이도 소고기뭇국도 어제 아침과 똑같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설마하며 시게루 씨가 펼친 신문을 보았을 때 확실하게 깨닫고 말았다. 7월 1일. 똑같은 헤드라인. 뭔가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게루 씨가 굳이 어제자 신문을 읽고 계신 게 아니라면 말이다.
"타카시 군. 좋은 아침. 생일 축하해."
토코 씨가 눈을 맞추며 웃었다. 시게루 씨가 신문을 접으며 말했다. "생일 축하한다. 타카시." 어제의 기억을 그대로 제생하는 듯한 지독한 기시감이 뇌리를 훑었다. "가, 감사합니다." 나는 애매하게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올해의 두 번째 7월 1일은, 그럼에도 첫 번째와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다. 은빛 줄기를 만났던 냇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수학 시간에 지명당해 어제 풀지 못했던 문제를 풀고 칭찬을 받았다. 타키가 생크림을 묻히려던 순간 한 발짝 뒤로 물러나 피했다가, 대신 니시무라에 의해 양 볼에 생크림 공격을 당했다. 목소리가 커지려 할 때마다 친구들을 진정시켜 선생님께 들키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는 내 행동의 변화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야옹 선생을 찾았다. 선생은 어제— 아니, 오늘 웬일로 집을 지키고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선생. 뭔가 이상해."
"으응? 뭐가?"
선생은 내 앞으로 온 요괴들의 선물을 술과 술이 아닌 것으로 분류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선생은 못 느끼는 거야? 오늘이 두 번째라는 거."
"뭬?"
선생이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알아. 터무니없는 소리인 거 안다구. 선생의 반응에 한숨을 푹 내쉬며 만 하루 넘도록 겪은 일을 설명했다. 원인으로 추정되는 은빛 줄기에 대한 것도.
"—그렇게 됐어. 믿기지 않는다면 오늘 저녁 메뉴가 뭔지 말해줄 수 있어."
"그건 확실히 흥미가 당기는…. 흠흠. 그나저나 성가시게 됐구나. 시간을 거스르는 힘이라니."
"뭐 아는 거 있어, 선생?"
"들은 적은 있다. 물을 거스르는 결들이 있다고."
선생의 말에 의하면, 내가 만난 은빛 줄기는 가닥가닥 모여 하나의 거대한 '결'을 이루는 요괴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들은 물을 거스르거나 따라 흐르며 이동하는데, 혹자는 그 요괴들이 물살뿐 아니라 시간마저 거스르는 힘을 지녔다 주장한다고 했다. 역시 이 현상은 내 발목에 감겼던 녀석이 원인인 것 같았다.
"하지만 무슨 수로 다시……."
다다미 위에 엎어져 고뇌에 빠져 있자, 1층에서 토코 씨의 부름이 들려 왔다.
"나츠메 군, 저녁 먹으렴~!"
"아, 네!"
기운차게 대답해 놓고서 한숨을 푹 쉬었다. 오늘 저녁이 뭔지도 미리 알고 있다. 선생은 내 몫의 가라아게를 세 개나 뺏어 먹을 것이다.
"에에이, 땅 꺼지겠다. 일단은 밥을 먹고 생각해!"
"너무 태평한 거 아냐? 게다가 선생은 내일이 되면 또 잊어버릴 거잖아!"
스스로가 내뱉은 말에 막막해졌다. 내일이 되면, 정확히는 오늘이 반복되면, 자신만이 첫 번째, 두 번째 칠월 일일을 기억한 채 또 하루를 살아가게 된다. 야옹 선생도, 히노에나 미스즈와 같은 그 어떤 강한 요괴에게 도움을 청한다 해도 그들은 자신과 같은 감각으로 고민해줄 수 없다. 점차 침울해지는 내 표정을 보고 야옹 선생이 혀를 찼다.
"걱정 마라. 다 생각해둔 수가 있어."
선생은 그렇게 말하며 먼저 1층으로 향했다. 그 뒤꽁무니를 보며, 병에 갇혀 무력하게 선생의 도움에 의존해야 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선생은 (좌충우돌하긴 했지만) 나를 곤경에서 구해주고, '대책은 제대로 생각해 뒀다'며 안심시키지 않았는가. 그래. 적어도 그때보다는 자유로운 상태야. 선생 말대로 일단은 밥이라도 먹고 생각해야겠다.
◆ ◆ ◆
나토리는 피곤한 얼굴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 틈새로 보이는 상대방은 멀끔한 얼굴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단 기색 따위는 추호도 보이지 않는다.
"…당신도?"
"예에."
마토바가 달그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조금 쓰네요." 얄미운 소리를 덧붙이면서. 그들은 이틀째의 칠월 일일을 보내고 있었다. 아침부터 자신들이 시간 왜곡에 휘말렸다는 사실은 깨달았지만, 서로에게 연락을 취할 단서를 잡은 것은 오후가 되어서였다. 각자의 일정이 바쁜 두 사람이었던지라 겨우 만난 지금 바깥에는 벌써 어둠이 내린 지 오래였다.
"나나세도 뭔가 어긋났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더군요. 나토리 당신만큼 명확하진 않았지만."
"요력의 차…때문이라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있나. 내 식신들도 전혀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요괴는 비껴간다, 라…. 당연한 걸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인간과 달리 시간에 속박되지 않으니까요."
나토리와 마토바는 각자 생각에 빠졌다. 나나세는 연관이 덜한, 자신들만의 공통점…. ………. 오래지 않아 두 사람의 머릿속에 같은 내용의 가장 신빙성 있는 가설이 떠올랐다. 게다가 다른 날도 아닌 7월 1일이잖은가. 나토리는 마토바 앞에서 그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아 가장 합리적인 가능성을 무시했다. 물론 마토바는 서슴을 이유가 없었다.
"나츠메 타카시 군에게 연락을 취해보죠."
"그건…."
나토리는 반사적으로 반론을 제기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마토바가 대답을 바라는 눈으로 나토리를 빤히 바라봤다. 나토리는 되도록 나츠메를 요괴 일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고, 특히 마토바와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츠메가 루프의 핵심 원인이라면 그도 이틀째 같은 날을 겪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것도 누구보다 생생한 기억을 가진 채. 나츠메 곁의 돼지고양이도 기억을 하지 못한다면, 나츠메는 아마도 혼자서……. '미치겠네….' 나토리는 허리를 세워 앉으며 대답했다.
"전화하기에는 늦은 시간이니 내일로 하죠."
"그래요…. 좋습니다. 루프가 또 반복된다면 내일이라는 말도 별 의미가 없을 테니."
마토바의 냉소적인 어투에 나토리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마토바가 벽에 걸린 시계를 흘긋 보더니 말했다. 자정을 약간 넘긴 시각이었다. 적어도 루프의 기준이 자정은 아니라는 단서 하나는 얻은 셈이었다. 마토바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오늘은 이만 실례토록 하겠습니다."
"잠깐, 당신 발목에—"
"나토리, 당신 발목—"
나토리와 마토바가 서로의 발목께에서 빛나는 은빛 원을 발견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발목을 휘감은 그것은 이내 보잘것없이 사그라들었다. 완전히 사라졌다고 여겼을 즈음 두 사람은 각자의 침대에서 눈을 떴다. 세 번째 7월 1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 ◆ ◆
타누마는 일어났을 때부터 줄곧 이상한 감각에 시달리고 있었다. 모든 일이 처음 겪는 것 같지가 않았다. 심지어 그는 버벅거리기 일쑤였던 영어 지문 해석도 술술 해냈다. 지문의 내용은 타임 루프를 소재로 한 SF영화의 기법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토록 강렬한 기시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머리를 싸쥐던 타누마가 예외를 발견한 것은 점심시간이었다. 그날은 나츠메의 생일이었고, 타누마와 친구들은 나츠메 몰래 깜짝 축하를 준비했다. 타누마는 친구들의 모든 말과 행동에서도 마찬가지로 익숙함을 느꼈다. 오직 나츠메만 제외하고. 게다가 묘하게 지쳐 보이는 나츠메의 표정도 신경 쓰였다. 타누마는 자신이 느끼는 감각이 나츠메와 관련되어 있을 거라는 직감을 지울 수 없었다.
"나츠메. 집에 가면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타누마는 방과후 나츠메를 따로 불렀다. 나츠메는 타누마의 진지하고 불안한 표정을 보고 눈을 크게 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타누마는 교문을 나서고 학생들과 길이 갈려 인적이 드물어지고 나서야 입을 뗐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 오늘이 낯설지가 않아."
"낯설지 않다니…."
나츠메의 표정이 흐려졌다. 타누마가 잘 아는 얼굴이었다. 요괴와 관련된 일을 솔직하게 말할까, 숨길까, 일부만 말할까,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재는 표정. 그리고 그 셈은 어디까지 언급해야 상대방이 다치지 않을지를 가장 큰 염두에 두고 있다. 타누마는 이 감각이 어떻게든 나츠메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자신의 추측이 들어맞았다고 확신했다.
"꼭 여러 번씩 겪는 일 같아. 혹시 나츠메는 이상하게 느껴지는 거 없어?"
그렇다고 추궁할 생각은 없었다. 나츠메가 부정한다면 스스로 해답을 찾을 각오도 있었다. 나츠메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사이 매미 한 마리가 유난히 크게 울었다. 평소라면 돌아가는 방향이 갈렸을 길목에서 나츠메가 멈춰 섰다. 단단한 표정이다, 라고 타누마는 생각했다.
"타누마. 잠시 우리 집에 와줄 수 있어?"
◆ ◆ ◆
두 번째 7월 1일 저녁, 선생은 저녁 식사를 배불리 해치운 뒤 역시 곯아떨어졌다. 나는 선생을 흔들어 깨운 뒤, 우선 하루가 언제 되돌아가는 건지 알아보기로 했다. 자정이 되어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내가 잠드는 시점을 기준으로 하는 듯했다. 우리는 그 사실을 확인한 뒤 비몽사몽간에 잠들었다. 그러나 평소보다 늦게 잠든 탓에 사흘째의 아침에는 늦잠을 자고 말았고, 선생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할 새도 없이 집을 나서야 했다.
'생각해둔 수라는 게 도대체 뭐냐고….'
선생은 자신 있게 말했지만, 본인이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해서야 아무런 소용이 없잖아. 벌써 세 번째로 듣는 내용의 수업에 눈꺼풀을 지탱하느라 힘겨웠다. 점심시간에는 이미 알고 있었던 깜짝 축하를 받으며 자신이 제대로 기쁜 얼굴을 하고 있는지 불안해졌다. 그야 마음을 담은 축하는 몇 번을 받아도 기쁘지만, 이런 형태로는 곤란하다. 친구들의 성의를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이 시간축을 되돌려 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타누마가 먼저 기시감에 대해 털어놓았을 때는 드디어 새로운 실마리를 발견하려나 싶어 숨통이 트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오랜만이야. 나츠메."
"나토리 씨! 그리고…. 무슨 일이시죠?"
한여름에도 시들지 않는 반짝거림을 자랑하는 나토리 씨가 우리 집 대문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뒤에는 검은 천으로 감싼 활을 진 마토바 씨가 서 있었다. 그를 발견하고서 나도 모르게 타누마 앞을 가로막듯 나섰다. 마토바 씨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한 걸음 나서려는 것을, 나토리 씨가 웃는 낯으로 제지했다.
"나츠메와 긴히 상담하고 싶은 건이 있어서 왔어. 그쪽은 타누마 군…이었나. 우리 구면이지?"
"네. 안녕하세요."
타누마가 벙쪄 있다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타누마는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머리를 길러 묶은 인물의 등장에 다소 당혹한 것 같았다. 그 마음 나도 알지…. 뭐라 말을 꺼내야 할까. 나토리 씨는 내가 마토바 씨를 껄끄러워한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 그를 동행해 집 근처까지 왔다는 것은 적잖이 급한 일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한 타누마를 돌려보낼 수는 없었고, 타누마와 마토바 씨를 조우하도록 두는 것은 더더욱 안될 일이었다. 곤란해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일까, 타누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정한 목소리였다.
"나츠메. '오늘은' 이만 돌아갈게. 다음에 얘기해줘도 괜찮으니까."
"하지만, 타누마—"
"에에이, 번잡스럽다! 뭐가 이렇게 소란스러워?"
"선생!"
호령이 들린다 싶더니 야옹 선생이 담벼락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선생도 집에 있었지. 점점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의 도가니가 되어 가는 기분이다. 담벼락 가장 가까이 서 있던 마토바 씨가 뒤를 돌아보더니, 야옹 선생과 눈이 마주치자 비스듬히 팔짱을 꼈다.
"이 정도의 거물 요괴에게도 기억은 남아있지 않던가요?"
"마토바!"
'기억이 없다니?'
마토바 씨의 어조는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 같기도, 떠보는 것 같기도 했다. 나토리 씨가 우리 쪽 눈치를 보며 작게 주의를 주었지만, 이미 다 들린 뒤였다. 혹시나 하는 예감이 스쳤다. 타누마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마토바 씨, '어제'의 기억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요. 나츠메 군."
"무슨 소리들이냐? 왜 나만 쏙 빼놓고 다들 알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선생이 도끼눈을 하며 짧은 팔을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저러다 담장에서 떨어지지. 나는 선생을 품에 안아 들고 대문 앞에 섰다.
"여기 서서 이야기하기도 뭣하니, 잠시 들어오시겠어요? 타누마도…. 타누마만 괜찮다면 부탁하고 싶어."
"내가 있어도 괜찮아?"
나츠메.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아. 타누마의 눈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분명 속으로 몇 겹이나 되는 걱정을 하고 있겠지. 내가 두 어른을 어려워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이 억지로 입을 열게 한 건 아닌지, 타누마가 있어도 되는 자리인지. 타누마답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그런 걱정을 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조금 괴로워졌다. 나는 타누마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나토리 씨와 마토바 씨를 보며 말했다.
"타누마도 어느 정도 위화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서 말해주려고 데려온 거예요. 함께 이야기해도 괜찮을까요?"
"나츠메……."
나토리 씨가 말끝을 흐렸다. 그 이유가 '우리들끼리의 대화를 방해받아서' 같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나토리 씨는 내가 타누마를 위험에 빠뜨리고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그런 나를 격려해 준 사람이니까. 그럴수록 섣불리 된다, 안 된다는 말을 꺼낼 수 없는 거겠지. 그 대신 마토바 씨가 툭 던졌다.
"괜찮지 않나요. 지금은 단서가 하나라도 많은 편이 좋으니까."
"…고맙습니다."
타누마를 바라보자 조금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나 역시 내키는 결정은 아니었지만, 마토바 씨 말마따나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다.
"이 답답한 녀석들아, 해 지겠다!"
선생이 결국 역정을 내며 품을 벗어나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그렇지. 지금 가장 상황 파악이 안 되어서 답답한 건 선생이겠구나. 조금 미안한 심정으로 선생을 따라가 현관문을 열었다. 후지와라 부부 두 분은 시내에 나가 계시기 때문에 여섯 시쯤 되어야 도착하실 것이었다.
"들어오세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세 사람의 조합이 나란히 실례합니다, 하고 인사하며 신발을 벗는 것을 보니 가벼운 두통이 지나가는 듯했다. 긴 오후가 시작되었다.
◆ ◆ ◆
나츠메가 이야기를 마쳤을 때, 세 사람과 한 마리는 각자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마토바였다.
"아무래도 이 루프를 인식하는 정도는 나츠메 군과의 관계성, 그리고 요력의 세기를 척도로 하는 것 같군요."
"나와 마토바 씨의 기억은, 어제 일을 떠올리는 것 같은 나츠메만큼 확실하고 뚜렷하지 않아. 기껏해야 중심 기억이 떠오르는 정도이지."
두 사람의 말에 나츠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라면 유독 타누마만 기시감에 시달리는 것도 이해가 갔다. 타누마는 감이 좋은 편이고, 자신과도 관계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가까이 지내니까. 나츠메는 또 자신이 타누마를 휘말리게 해버렸다는 생각에 조금 침울해졌다. 이번에는 타누마 뿐만이 아니다. 나토리도, 마토바도. 어쩌면 여기 있지 않은, 자신과 관련 있는 요력이 센 인간도.
"나츠메, 너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구나."
"쓸데없는 생각이라니, 선생."
"흥, 네 녀석이 하는 생각이야 뻔하지. 어차피 이것도 저것도 네 탓으로—"
"그나저나 나츠메. 그 냇가의 상류라고 하면 짐작 가는 곳이 있는데."
생각에 잠겨 있던 타누마가 불쑥 내뱉었다. 딱히 선생의 말에 끼어들 의도는, 그리고 자각도 없었던 것 같지만, 얼결에 말이 끊긴 선생이 타누마를 매섭게 쏘아봤다. 타누마는 아는지 모르는지 습관적으로 야옹 선생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선생은 저항하지도 못하고 골골대기 시작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아마도 우리 절 근처로 이어질 거야."
"잘 됐군요. 지금으로서 단서는 그 요괴가 거슬러 올라간 곳뿐이니."
"그럼—"
나츠메가 당장이라도 찾아갈 기세로 몸을 일으키려 했을 때였다. 현관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타카시 군. 손님 왔니?"
토코의 목소리였다. 아차, 시간 확인하는 걸 완전히 잊고 있었다. 나츠메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낭패한 빛을 띄웠다. 그는 저도 모르게 마토바 쪽을 힐끔 쳐다보고 말았다. '후지와라 부부는 당신에 대해 모두 알고 있나요?', '말을 안 했나요? 그럼 제가 말씀드릴까요?' 그가 후지와라 부부를 두고 했던 언급을 떠올리면, 마음 같아서는 창문으로 나가게 하고 싶었다. 물론 현관에 벗어두고 온 신발 때문에라도 그럴 수는 없었지만.
"후후. 너무 경계 말아요. 나도 이제 와서 나츠메 군한테 미움받으면 곤란하거든요."
마토바가 선선히 웃어 보였다. 나츠메의 의혹이 그 한마디에 풀릴 리 만무했으나, 지금으로선 다른 도리가 없었다. 아래층에서 후지와라 부부의 조곤조곤한 말소리와 부스럭거리는 장바구니 소리가 들리자, 야옹 선생이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 몽실몽실한 꼬리를 흔들었다. 나츠메로부터 오늘 저녁 메뉴까지 들어 냈던 탓이다.
"가라아게다. 가라아게!"
"선생. 지금 가보지 않으면 해가 지고 말 거야."
자신도 함께 나갈 것이라는 어조를 담은 발언에, 타누마와 나토리가 동시에 나츠메를 쳐다봤다. 나토리가 나츠메의 어깨를 가볍게 짚으며 말했다.
"잠깐, 나츠메. 너는 여기 있도록 하렴."
"하지만, 나토리 씨…."
"나츠메. 얼마나 걸릴지 몰라. 제때 돌아오지 못하면 두 분이 실망하실 거야."
타누마도 드물게 강한 어조로 주장했다. 나츠메가 '오늘'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후지와라 부부로부터 받은 선물에 대해 말했을 때. 그 기쁘고도 쑥스러워하는 얼굴을 보아버렸기 때문이다. 나츠메에게 그런 표정을 짓게 한 시간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요. 듣자 하니 오늘은 나츠메 군의 생일이라니까."
한발 물러서서 세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마토바가 말했다. 나토리가 그런 걸 다 고려하고 웬일이냐는 시선을 보내자 마토바가 웃었다.
"나츠메 군이 있으면 확실히 편리하겠지만, 없어도 큰 지장은 없을 것 같아서요."
나토리는 역시나라는 듯 고개를 홱 돌렸고, 타누마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 사람은 일부러 미움받을 말만 골라 하는 걸까….' 그러다 고개를 붕붕 저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 대해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타누마가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아무튼, 뭔가 찾으면 전화할게."
"…알겠어. 고마워…. 대신, 선생도 타누마를 따라가 줘."
"무슨 소리냐! 나는 토코의 스페셜 저녁밥을 먹어야만— 꽥!"
선생의 목덜미를 잡아든 나츠메가 진지한 눈으로 말했다.
"가라아게 3개. 남겨둘게."
"5개다."
"4개."
"흥! 배려 깊은 이 몸이 양보해주지."
그제야 나츠메가 한시름 덜어낸 얼굴로 웃었다. 길 안내에 꼭 필요하다지만, 타누마만 둘 사이에 끼워 보내는 것은 정말로 석연찮았다. 토코가 1층에서 소리높여 나츠메를 불렀다.
"타카시 군~ 위에 있니?"
"아, 네! 지금 내려가요!"
후지와라 부부는 줄지어 내려온 네 명과 한 마리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구면이지만 연예인인 나토리와, 아무리 잘 봐줘도 나츠메 또래는 아닌 것 같은 장발의 남성이 집에 들어와 있으면 누구라도 놀랄 것이다.
"멋대로 죄송해요. 나토리 씨와 나토리 씨의 친구…분인 마토바 씨세요. 먼 곳에서 와 주셔서 잠시 얘기를 나눴어요."
"어머!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걸."
"타카시 손님이면 우리 손님이나 마찬가지지. 더 있다 가셔도 되는 것을."
"타누마 군. 저번에 나눠준 떡은 입에 맞았니?"
"네. 저희 아버지도 꼭 정말 맛있었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감사합니다."
타누마가 토코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나토리도 시게루와 너스레를 떨었다. 그 옆에 선 마토바는 '나토리의 친구'라는 나츠메의 소개만으로 아무것도 묻지 않는 부부에게 일말의 흥미를 느끼면서, 괜한 말 얹지 않고 가만히 웃고만 있는 일에 성공했다. 짧은 환대 겸 송별이 끝나고, 나토리가 대문까지 마중을 나온 나츠메를 돌아보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나토리 씨…."
"그리고…." 나토리는 잠시 망설이더니 덧붙였다. 급하게 오느라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해 겸연쩍은 미소와 함께.
"생일 축하한다. 나츠메."
"생일 축하해요. 나츠메 군."
얼결에 인기 배우와 마토바 일문의 당주에게 생일 축하를 받게 된 나츠메가 얼떨떨하게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타누마가 자신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한쪽 눈을 찡긋했다. 나츠메는 세 사람과 한 마리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오랜 배웅을 했다.
◆ ◆ ◆
해가 산릉선을 넘어가며 나무 그림자가 저만치 길어져 있었다. 곧 완전히 어두워질 것 같았다. 타누마는 절에 들러 손전등을 챙겨오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여름의 숲 냄새가 폐를 돌아 나갔다. 산길은 점차 좁고 가팔라졌다. 종종 갈림길이 나타났지만 타누마는 헤맬 줄을 몰랐다. 그는 이런 쪽으로 감이 좋았다. 타누마는 손등으로 턱 끝에 매달린 땀을 훔쳤다. 장마철을 갓 지난 덕에 밤공기는 시원했지만, 여름은 여름이었다.
"죄송해요. 생각보다 안쪽이네요."
타누마가 두 어른을 돌아보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나토리와 마토바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친 티를 숨기려는 기색이 비쳤다. 두 사람은 그래도 직업상 평균 이상의 체력을 보유한 편이었는데도 고등학생의 체력에는 비할 바가 못 됐다. 말없이 나아가고 있으려니 우리히메가 돌아왔다.
"주인님. 눈에 띄는 특이점은 딱히 없었습니다."
"고생했어."
우리히메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타누마가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자 나토리가 설명했다.
"식신을 보냈는데 특이한 건 없었다고 해. 나무가 우거져서 위에서는 찾기 힘든 모양이야."
"역시 그런가요…."
"헤에. 이 아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군요."
"감은 좋은 편이지."
야옹 선생이 타누마의 어깨에 폴짝 올라타며 말했다.
"그럼 아까부터 우리들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요괴들도 보이지 않겠군요?"
"겁 많은 잔챙이들이 기웃거리고 있을 뿐이잖습니까. 고등학생한테 겁주지 마시죠."
"아하하…. 검은 인영 비슷한 것이 언뜻언뜻 보이기는 해요."
어중간하게 보이는 게 제일 성가시지. 마토바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나토리가 재차 경고해올 게 뻔해 말로 하진 않았다. 몇 분을 더 걷자 희미한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기예요." 타누마가 가리킨 곳은 꽤 가파른 경사가 진 곳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내려보자, 과연 산길을 따라오지 않았다면 접근하기 힘들었을 폭 좁은 계곡이 보였다. 그러나 나토리와 마토바가 놀란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저것들은…."
"아무래도 나츠메 군이 말한 은빛 줄기 같군요."
계곡물은 온통 은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정확히는 가닥가닥의 줄기가 각자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았으나 손전등을 켤 필요가 없을 정도로 밝았다. 은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형세로 보이기도 했다. 나토리와 마토바는 그것이 이틀째의 7월 1일 서로의 발목에서 보았던 원과 같은 빛깔을 띠고 있음을 감지했다.
"타누마, 네게도 저것들이 보이냐?"
"달이 유난히 밝다고만 생각했어."
선생의 물음에 타누마가 고개를 저었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니 달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경사진 내리막 중턱에 서서 나토리가 안경 너머로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이동하지 않지? 쉬고 있는 건가?"
"하류로 향하는 길이 막혀 있군요."
마토바의 지적대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하류로 내려가는 물길을 막고 있었다. 나츠메가 봤다는 탁한 기운과 유사했으나 스케일은 훨씬 컸다. 넓이는 계곡 골짜기를 꽉 채운 데다, 스멀대는 끄트머리까지 치면 높이도 성인 남성의 키만 할 것 같았다. 어쩌면 꼼짝 못 하는 은빛 줄기와 정체된 오늘에 관련이 있을지도 몰랐다.
"뭔지 몰라도 거슬리는구나. 에잇!"
야옹 선생이 타누마의 어깨에서 뛰어내리며 이마의 문양에서 눈 부신 빛을 발했다. 세 사람이 팔로 눈을 가렸다가 다시 바라보자, 검은 기운은 성기어지기는 했으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슬금슬금 밀도를 회복하는 것을 보니 한 번에 없애야 할 것 같았다.
"폰타. 나츠메는 손으로 흩어냈다고 했었지?"
"녀석은 강한 요력을 무식하게 쓰니까 말이다."
그러나 나츠메였대도 이만한 규모를 흩어내기는 어려웠을 것이었다. 그 작은 기운도 잠시나마 나츠메의 팔에 휘감겼다는데, 섣불리 다가갔다간 위해를 입을지도 몰랐다. 나토리가 품에서 종이인형을 꺼내 날려 보냈다. 일부라곤 하나 나토리의 요력을 담은 종이인형이었다. 그 덕에 안개 끄트머리를 헤쳐 물리는 듯했으나, 곧바로 검은 기운에 휘감기더니 집어 삼켜져 버렸다.
"이런…."
"직접 닿는 건 위험하겠군요."
부적 한둘로도 어림없어 보였다. 이것까지 써야 할 거라곤 생각지 않았는데. 마토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리며 등에 진 활을 풀어 조립하기 시작했다. 타누마는 활줄 없는 활을 흘긋거리다, 예리하게 별러진 진짜 화살촉을 보고 주춤 뒤로 물러섰다.
"오른쪽 중앙, 그다음에 왼쪽 중앙을 쏠 겁니다."
나토리와 야옹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마토바의 일격으로 완벽히 소멸되지는 않을 터이니, 자신들이 타이밍을 맞춰 협력해야 했다. 마토바가 능숙한 기세로 활을 당기고, 부적을 단 화살이 공기를 가르며 쏘아져 나갔다. 화살이 탁한 기운에 닿자 푸른 빛이 터지듯 퍼져나갔다. 연속으로 두 발, 안개가 거의 걷혔으나 예상대로 끄트머리의 기운들까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흩어졌던 기운들이 다시 뭉치려는 찰나 마다라가 본체로 화해 아까보다 더욱 환한 빛을 발했다. 그것마저 피해 어둠 속으로 내빼려는 녀석들은, 나토리가 여러 장 엮은 종이인형을 날려 보내 제압했다. 셋은 꽤 호흡이 좋았다.
타누마의 시야로도 대강의 양상은 파악되고 있었는데, 계곡물에 비친 달빛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챈 것도 그였다.
"빛이 움직여요!"
탁한 기운이 남아 있을까 예의주시하던 두 사람과 한 마리가 타누마의 외침에 주의를 돌렸다. 은빛 줄기는 언제 잠잠했냐는 듯 활기를 띠고 물결을 따라 나돌고 있었다. 마치 검은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은빛 줄기는 물의 흐름을 거슬러 올랐던 것과 같이 손쉽게 미끄러져 갔다. 거대한 행렬은 물속에 잠긴 달이 흘러가는 모양새라서 타누마는 무심결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전히 달은 뜨지 않은 채였다.
세 사람은 타누마가 든 손전등 빛에 의지해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선생은 지쳤다며 타누마의 어깨에 둥지를 틀었다. 나토리가 미심쩍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정말 이걸로 루프가 해제될까."
"그러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마침 오늘 중요한 협상이 있어 요긴했지만, 그것도 내일로 나아가지 않으면 쓸모없으니."
나토리의 말을 받은 마토바가 혀를 찼다. 나토리와 야옹 선생은 협상에 임한 마토바의 모습을 상상하고 잠시 오한에 떨었다. 영문도 모르고 패를 전부 꿰뚫린 채 협상의 우위를 빼앗긴 상대방이 불쌍할 지경이었다. 선생이 혀를 찼다.
"에잉. 나츠메 녀석, 또 정체 모를 것이나 구해서 성가시게 만들기는."
"곤란하긴 했지만, 나름의 보답이었던 게 아닐까?"
타누마의 말에 나토리가 "보답?"이라며 반문한다. 마토바도 흐음, 하고 의문을 드러냈다. 타누마는 둘의 반응에 그다지 위축되지 않은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네. 일단 생일이라는 건 대체로 길한 날이니까요. 하루 정도는 반복되어도 좋을 정도로."
"그래서 자정이 아니라 나츠메가 잠드는 시점을 기준으로 루프가 진행되었던 거구나."
"흥. 요괴는 인간들이 멋대로 정한 시간의 기준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러다 뜻밖의 방해를 받아 며칠이고 반복되도록 방치했다는 거군요."
뼈 있는 마토바의 말에 타누마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에게 시간을 돌리는 능력 같은 것은 없지만, 요괴의 마음이 조금쯤은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기뻐하리라고 생각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을 해주고 싶은 마음. 그것이 도리어 상대방을 곤란하게 했을 때의 미안함과 슬픔도. 타누마는 나츠메가 구해줬다는 한 줄기의 요괴가 너무 자책하고 있지 않기를 바랐다. 사정을 들은 나츠메라면 분명 '날 위해서 애써준 거지? 고마워.'라고 말했을 거라 생각하며.
◆ ◆ ◆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제를 끝내고 해가 다 지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타누마가 조금 걱정이지만, 셋은 충분히 강하니 괜한 염려를 할 필요는 없다, 고 생각하면서도 쉬이 떨쳐내기 어려웠다. 선생 몫으로 남겨둔 가라아게도 벌써 식은 지 오래였다.
'타누마네에 전화를 해 봐야 하나….'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을 때였다. 언제나처럼 노크 없이 호방하게 창문 미닫이를 드륵 열어젖히는 소리가 나고, 야옹 선생이 폴짝 뛰어 들어왔다. 평소보다 다다미 바닥에 뛰어내리는 소리가 묵직하다 했더니, 등에 선생만 한 손전등을 지고 있었다.
"선생!"
평소라면 발을 닦고 들어오라며 한 소리 했겠지만, 반가움이 우선이었기에 선생 앞에 앉아 손전등을 내려놓는 것을 도와주었다. 열린 창 너머로 대문 밖에 선 나토리 씨와 마토바 씨가 보였다. 나토리 씨는 벙거지 모자를 벗어 흔들어 보였고, 마토바 씨는 고개를 비스듬히 까딱해 보이곤 함께 돌아가 버렸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눈으로 좇을 새도 없이, 선생은 등에서 손전등이 떨어지자마자 벌렁 드러누우며 팔다리를 휘적거렸다.
"아이고, 삭신이야. 나츠메, 저녁밥이다! 내 저녁밥은!?"
"여기 있어. 그나저나 어떻게 됐는지나 알려줘. 타누마는?"
선생은 가라아게를 웅냠냠거리며 뭐라뭐라 말했지만, 하도 전투적으로 입에 밀어 넣느라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무사히 돌아와서 태평한 걸 보니 잘 해결된 것 같긴 한데…. 그러고 보니 저녁도 안 먹고 나갔었지. 요괴는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지만 선생의 식욕을 보면 영 미심쩍어지곤 한다. 결국 급하게 먹다 목이 막힌 선생에게 물컵을 쥐여주곤 한숨을 쉬었다.
"알았으니까 천천히 먹어."
"햐~ 잘 먹었다. 이제 좀 살겠구나."
불룩해진 배를 두드리는 선생 앞에 후식으로 케이크로 밀어주고, 바닥에 내팽개쳤던 손전등을 책상에 올려놓았다. 그나저나 웬 손전등이지? 선생은 포크로 케이크를 재주껏 퍼먹으며 말했다.
"타누마 녀석은 나토리가 바로 돌려보냈다. 이 손전등은 타누마가 두 녀석한테 빌려준 거야. 유약한 인간들은 밤에 빛이 없으면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구나. 그나저나 이 케이크, 안에 든 딸기가 큼지막한 게 마음에 드는군. 한 조각 더 없냐, 나츠메?"
"나중에 돌려줘야겠네. 케이크는 그게 마지막이었어, 선생."
선생은 타누마를 따라간 상류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타누마에게는 손전등뿐 아니라 감사 인사도 전해야겠다. 타누마가 없었다면 그것들이 어디 있는지 찾느라 며칠을 더 보내야 했을지도 모른다. 사실은 자꾸만 말려들게 해서 사과하고 싶었지만, 분명 타누마가 바라는 건 미안하다는 말이 아닐 것 같았다. 나토리 씨와 마토바 씨에게도 빚을 진 셈이구나. 마토바 씨가 보답으로 무리한 요구는 않는다면 좋으련만.
"이게 그 시계냐?"
선생이 내 손목에서 헐렁거리는 시계를 앞발로 툭툭 쳤다. 후지와라 부부로부터 세 번째로 받은 생일선물이었다.
"응. 선생도 한번 차볼래?"
시곗줄을 풀어 선생의 짧은 팔에 가져다 댔더니 너무도 어울리지 않아 웃었다. 인간의 시간으로 날 속박하려 들지 마라! 선생이 짐짓 눈을 부라렸지만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그날 불을 끄고 이불을 덮을 때까지 선생은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지극히 선생답다고 생각했다. 대신 선생은 이 소중한 날을 지키기 위해 애써 주었으므로,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큰 선물을 받은 셈이었다. 역시,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기 때문에 귀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돌아오지 않을 지금을 힘껏 살아가도록 하자. 나는 다가오는 7월 2일을 맞이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